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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1975년 베트남전쟁에 5만명 한국군 파병

    • 6방두놈
    • 13-10-02 01:55
    • 2,558

    1969년~1972년: 베트남화[편집]

    닉슨 독트린[편집]

    남베트남군의 선전지. 베트남어로 “베트콩 조심해”라는 포스터 아래로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으니 항복하라는 선전문이 영어로 작성되어 있다.
    새로 미국의 대통령이 된 리차드 닉슨은 구정 대공세가 지나고 난 뒤 철군 계획을 발표하였다. 닉슨 독트린이라 불린 그의 계획은 남베트남군을 강화시켜 스스로의 영토를 방어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문에 닉슨의 정책은 “베트남화”라고도 불렸다. 베트남화는 케네디 정부가 구상하였던 남베트남의 독자적 전쟁 수행과 비슷한 것이었지만, 그것과는 달리 분쟁 확산의 방지를 위해 미군이 계속 개입한다는 점이 달랐다.
    닉슨은 한 발표에서 “저는 오늘밤 15만 명의 추가적인 철군 계획을 설명하려 합니다. 철군은 내년 봄까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으로 베트남에 주둔한 미군 병력은 15개월 전과 비교하여 총 265,500 명으로 줄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124]
    1969년 10월 10일 닉슨은 자신이 베트남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B-52s 폭격기 편대에 핵폭탄을 무장하고 소련 영공 부근을 비행하도록 지시하였다. 닉슨은 또한 정전 협상을 지속하는 한편, 차기 주베트남 미군 사령관인 크라이튼 아브람스에게 남베트남군과 협조하여 북베트남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공격을 지속하라고 명령하였다. 동시에 닉슨은 세계적인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소련중화인민공화국데탕트를 추진하여 초강대국이 동시에 핵무기를 감축하자는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닉슨은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이 북베트남에 대한 원조를 지속하는 것에 실망하였다.[125]
    닉슨은 미국의 침묵하는 다수가 자신의 전쟁 정책을 지지한다고 주장하였지만, 미라이 학살그린 베레캄보디아를 비밀리에 폭격한 감마 계획 등이 알려지면서 미국 내의 반전 운동은 점점 거세지게 되었다.[126] 1970년 초 미군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던 내륙 지역에서 철수하여 기지를 해안 지역으로 옮겼고, 이로써 1969년 보다 사상자를 줄일 수 있었다.[124]

    호찌민의 죽음[편집]

    미국 좌파 단체가 발행한 호외, 호찌민의 유언시가 영어로 번역되어 적혀있다.
    1969년 9월 2일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이 사망하였다. 호찌민은 유언으로 당의 단결과 전쟁 후 국토 재건을 당부하였다. 일생을 프랑스, 일본, 미국과 상대로 싸웠던 호찌민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자이기 이전에 민족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남베트남 정부의 지도자였으며 호찌민을 상대로 싸웠고 한때 남베트남의 부통령을 지낸 응우옌까오끼는 전쟁 후 “그는 베트남 인민들에게 존경 그 자체였다. 그는 프랑스는 물론 다른 외침에 대항하는 투쟁에 언제나 앞장섰다. 내가 어려서 철이 없었을 때, 대부분의 베트남 사람들은 호찌민을 대단한 애국자로 생각했다. 나도 그를 대단히 칭송했었다” 고 말했다.[127] 미국의 CBS는 광고없이 7분간 호찌민의 사망을 해드라인 뉴스로 보도하였다.[128] 1969년 9월 8일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10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호찌민의 장레식이 치러졌다.[129]

    캄보디아 라오스 비밀 폭격[편집]

    1955년 캄보디아의 군주 노르돔 시아누크는 중립을 선언하였다.[130] 하지만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캄보디아 영토에 기지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시아누크는 전쟁의 여파가 캄보디아로 확산되는 것을 피하고자 이를 묵인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1969년 캄보디아의 이러한 정책을 바꾸라고 압력을 가하였고, 캄보디아는 더 이상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였다.
    닉슨 대통령은 캄보디아의 중립을 지지한다는 미국의 기존 입장과 달리 캄보디아-베트남 국경지대를 비밀리에 폭격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1969년 4월 닉슨은 시아누크에게 서신을 보내 국경지역의 폭격을 허용할 경우 미국은 “캄보디아 왕국의 주권과 중립성, 그리고 영토 보전”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하였지만, 시아누크는 이를 거절하였다.[131] 1970년 캄보디아 쿠데타가 일어나 친미 성향의 론 놀 수상이 시아누크를 퇴위시키고 집권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부군과 크메르 루즈 사이에 캄보디아 내전이 발생하였고, 북베트남은 크메르 루즈의 요청을 받아 내전에 개입하였다.[132] 미군과 남베트남군 역시 캄보디아에 개입하여 캄보디아 전역에서 전쟁을 치렀다.
    미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자 베트남전 반대 운동은 더욱 거세졌다. 오하이오 주에서는 켄트 주립대학교에서 반대 시위를 벌이던 네 명의 학생이 총격을 받고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이에 격분한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면서 반전 운동은 더욱 커졌다.[133]
    1971년 《뉴욕타임즈》는 미국의 베트남 개입에 대한 사항을 정리한 일급 기밀 문서인 펜타곤 보고서를 폭로하면서, 미국이 오랫동안 남베트남 정부의 국방부 고위 관료들에게 뇌물을 건낸 사실을 보도하였다. 하지만, 미국 연방 대법원은 정부의 이런 행위가 합법이라고 결정하였다.[134]
    1971년 2월 남베트남군은 라오스 영토 내의 호찌민 통로를 봉쇄하기 위한 람선 719 작전을 시작하였다.[52] 당시 라오스는 표면상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북베트남의 호찌민 통로를 묵인하고 있었다. 작전에 나선 남베트남군은 저항군과 교전한 뒤 후퇴하다 길을 잃었다. 남베트남군은 잘못된 길을 헤매다 연료가 떨어지자 차량을 버리고 미군이 헬리콥터로 후송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미군은 남베트남군의 탱크와 차량이 적에게 노획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파괴하여야만 하였다. 그러는 사이 북베트남의 공격으로 남베트남군의 절반 가량이 죽거나 생포되었다. 결국 베트남군의 단독 작전은 큰 실책으로 끝났고, 이는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 역시 실패하였다는 것을 뜻하였다. 카르노는 “잊지 못할 실수였다. …… 미군에 의해 5년에서 10년 동안 훈련된 베트남군 고위 장교들도 그다지 배운게 없었다”고 기록하였다.[135]
    1971년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철군하였다. 미군 역시 196,700 명으로 감축되었고, 1972년 2월까지 45,000 명을 추가로 철군하기로 되어 있었다. 한편, 미국의 반전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136]
    1972년 부활절 공세에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남베트남 북부 지역을 신속히 공격하면서 동시에 캄보디아를 지나 남베트남 중부를 양단하는 공세를 가했다. 미국 공군은 뒤늦게 공습에 나섰지만 공세는 이미 지난 뒤였다. 이로써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은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 다시 한 번 드러나게 되었다.

    1973년: 파리 평화 협정[편집]

    베트남 전쟁은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주요 논점이 되었다. 닉슨에 대항하여 민주당 후보로 나선 조지 맥거번은 베트남에서 철수해 오는 군인들이 내리는 기차역에서 선거 캠페인을 하였다. 닉슨의 국가 안보 자문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북베트남의 레득토와 비밀리에 정전 협상을 지속하고 있었다. 1972년 8월 키신저와 토는 합의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남베트남의 대통령 티에우는 평화 협정 대다수의 내용을 변경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북베트남이 협정 내용을 공표하자 닉슨 정부는 북베트남이 기만 전술을 쓰고 있다고 비난하였고, 협상은 중단되었다.
    라인베커 II 작전 중인 미국 공군, 1972년 12월
    닉슨은 남베트남에게 여전히 지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고 북베트남으로 부터 유리한 협정 조건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1972년 12월 18일부터 29일까지 하노이하이퐁를 폭격하는 라인베커 II 작전을 실행하였다. 무차별 폭격 작전에 사용된 폭탄은 총 12만 톤으로 히로시마 원자 폭탄의 5배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이중 4만 톤이 하노이 시내에 집중되었다. 이 폭격으로 북베트남의 경제와 공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같은 시기 닉슨은 남베트남의 티에우를 압박하여 남북 양자간의 평화 유지와 미군 철수를 골자로 하는 협정 조건을 승인하도록 하였다.[137]
    1973년 1월 15일 닉슨은 북베트남에 대한 공격을 중지한다고 발표하였고, 1월 27일 “종전과 베트남의 평화 복원에 대한”파리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을 공식적으로 종결하였다. 평화협정이 체결된 뒤 베트남 남북 정부는 휴전하였고 미군 전쟁포로가 석방되었다. 파리 평화 협정은 제네바 협정과 같이 남북 양측의 영토를 보장하고 선거를 통하여 통일 정부를 구성하도록 규정하였으며, 60일 안에 모든 미군이 철군하도록 하였다. 피터 처치는 “이 조약에 따라 이행된 것은 미군의 완전한 철수 밖에 없었다”고 평하였다.[138]

    미국 내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편집]

    1971년 4월 24일 워싱턴 D.C.의 반전시위
    미국 안에서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이유는 다양하였다. 베트남 전쟁 동안 일어난 대규모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초기 반전 운동은 미국이 제네바 협정에 따른 총선거를 거부하고 지엠 정권을 지원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전쟁에 반대하였다. 존 F. 케네디 역시 상원의원 시절에는 베트남 전쟁 개입을 반대하였다.[82]
    가톨릭 노동자 운동과 같은 신좌파 단체들은 미국 정부가 보이는 반공주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등에 대한 반대의 일환으로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였다. 한편, 스테펀 스피로와 같은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이 정의로운 전쟁이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하였고, 노먼 모리슨과 같은 사람들은 팃꽝득의 행동과 베트남 사람들의 단결을 보면서 전쟁을 반대하였다. 또한,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은 유혈 사태의 확대만을 가져올 것이라는 비판등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 개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매파”, 반대하는 사람들은 “비둘기파”로 불렸다.
    1968년 미라이 학살이 폭로 된 이후 미국 내 반전 운동은 점점 확산되었다. 1968년 8월 26일부터 29일까지 민주당이 주최한 1968년 민주 전국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139] 1969년 10월 15일 미국에서는 수백만 명이 참여하는 반전 시위가 열렸다.[140] 오하이오 주 켄트 주립 대학교에서는 진압부대가 시위를 하는 대학생을 향해 총격을 가해 네 명의 학생이 목숨을 잃는 켄트 주립 대학교 발포 사건이 일어났다.[141] 이러한 반전 운동은 미국이 베트남 철군을 결정한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142]

    1973년~1975년: 미군 철수 이후[편집]

    1973년 석방된 미군 전쟁 포로를 실어나른 수송기는 “하노이 택시”라고 불렸다.
    닉슨 정부의 “베트남화” 정책의 마지막 해가 되자 베트남 주둔 미군의 수는 급격히 줄었다. 1971년 3월 5일에는 맨 처음 베트남에 투입되었던 제5 특수군단이 자신들의 본부였던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브래그 요새로 철수하였다.[143] [주해 1]
    북베트남의 외무장관 레득토와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사이에 파리 평화 협정이 체결되고 베트남의 대통령 응우엔번티에우가 마지못해 협정에 서명한 뒤, 미군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였고 북베트남과 미군 사이에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다. 헙정에 따라 북베트남은 물자의 조달과 같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평화 협정의 체결로 키신저와 토는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지만, 토는 아직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이를 거부하였다.
    평화 협정이 체결되자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측은 정전 기간을 최대한 저신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사용하려 하였다. 반면에, 사이공은 정전이 발효되기 직전에 미국으로부터 받은 막대한 원조 물자를 사용하여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에 대항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였던 쩐반짜는 1973년 3월 미국의 공습이 멈춘 틈을 타 호찌민 통로를 이용하여 하노이로 가서 이후의 전략을 세우는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1975년과 1976년 사이의 건기를 최종 공격 시기로 잡았다.[146]
    1972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은 맥거번을 상대로 총 50개 주 가운데 49개 주에서 승리하였다. 1973년 3월 15일 재선에 성공한 미국 대통령 리차드 닉슨은 만일 공산주의 세력이 남베트남을 상대로 무력을 행사한다면 미국 역시 개입할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닉슨은 베트남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그레이험 마틴을 남베트남 대사로 파견하였다. 한편, 미국 국방부 장관 제임스 R. 슈레징거는 북베트남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폭격을 재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73년 6월 4일 미국 상원은 이러한 개입을 금지하는 처치 어멘드먼트 건을 가결하였다.[147]
    제4차 중동 전쟁때문에 촉발된 1973년 유류 파동으로 남베트남은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었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1974년 1월 건기를 맞아 공세를 시작하였다. 55명의 남베트남 병사가 사망한 두 번의 무력 충돌이후 남베트남의 티에우 대통령은 전쟁이 재발하였고, 이어서 파리 평화 협정은 효력을 상실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정전 기간 동안 남베트남 측 사상자는 2만 5천여 명에 달했다.[148]
    1974년 8월 9일 리처드 닉슨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자 제럴드 포드가 미국의 대통령 직을 승계하였다. 이때, 의회는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 금액을 1억 달러에서 7백만 달러로 삭감하였다. 1974년 미국의 보궐 선거 결과 민주당이 의석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정부의 전쟁 수행에 대한 반대가 더욱 강화되었다. 의회는 1975년 지원 예산 가운데 군사 활동 부분을 삭감하였고, 1976년 지원분에 대해서는 전액을 삭감하였다.
    1973년에서 1974년 사이의 건기 공세를 성공시킨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 짜는 1974년 10월 하노이의 전략회의에서 다음 건기 때에는 보다 광범위한 공세를 펼쳐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시기, 호찌민 통로는 자주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짜는 국도를 이용한 합법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하노이를 방문하였다[149] 북베트남의 국방장관 지압은 짜의 계획대로 대규모 공세를 일으킬 경우 미국이 다시 개입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썩히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따르기로 하였다. 지압과 짜는 호찌민 사후 베트남 공산당의 제1서기를 맡고 있던 레주언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짜는 캄보디아에서부터 프억렁(Phước Long) 성을 공격하여 호찌민 통로에 대한 봉쇄를 푸는 한편, 공격의 규모를 제한하여 미국이 다시 개입할 명분을 주지는 않으려고 하였다.
    1974년 12월 13일 북베트남군은 프억렁 성에 있는 14번 통로를 공격하였다. 1975년 1월 6일 성도(省都)인 프억빈이 함락되자 포드 정부는 남베트남에 대한 지원 재개를 의회에 요청하였지만 거부되었다. 프억빈이 함락된 뒤에도 미국의 지원이 없자 남베트남의 지배층은 혼란에 빠졌다.
    중앙 고원 지역을 빠른 속도로 확보한 반띠엔중(Văn Tiến Dũng)은 레주언에게 “우리가 이렇게 완벽히 군사적 정치적으로 성공한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크나큰 전략적 우위를 갖게 되었다”고 보고하였다.[150]
    1975년 초 당시 남베트남군은 북베트남군에 비해 3배나 많은 대포와 두배 더 많은 탱크, 그리고 1,400 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병력 역시 두배 이상 많았다.[151] 그러나, 석유 가격 인상으로 상당수는 사용할 수 없었다. 반면에 북베트남군은 공산주의 국가들로 부터 받은 원조를 바탕으로 잘 조직되어 있었고, 사기 또한 높았다.

    275 작전[편집]

    1975년 3월 10일 중 장군은 탱크와 대형 곡사 화기를 동원하여 중부 고원지역을 공격하는 275 작전을 시작하였다. 이 작전의 목표는 닥락 성부온마투옷이었다. 중 장군은 작전이 성공하면 플레이쿠를 공격하여 1976년까지 장기적으로 전역 작전을 펼칠 계획이었다. 3월 11일 남베트남군은 별다른 저항도 없이 패퇴하였다. 북베트남은 다시 한 번 스스로도 놀란 신속한 승리를 거두었다. 중 장군은 곧바로 플레이쿠를 공격하였으며 연이어 꼰뚬 성의 성도까지 진군하였다.[152]
    남베트남군의 장군 출신인 남베트남의 대통령 응우옌반티에우는 남베트남군을 일시적으로 후퇴시켜 재집결한 뒤 반격하는 작전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남베트남군은 이미 통제불능의 상태에 있었다. 3월 20일 티에우는 이전의 작전을 취소하고 후에를 사수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긴급한 작전 변경은 혼란만을 더 키웠다. 3월 22일 북베트남군은 후에를 포위하였고, 3월 30일 10만명의 남베트남군은 항복하였다. 후에에서 승리한 북베트남군은 곧이어 다낭으로 개선 행진을 하였다. 이로써 베트남 중부는 북베트남의 것이 되었다.[153]

    최종 공격[편집]

    베트남의 과반 이상을 얻게 되자 북베트남 정치국은 중 장군에게 사이공을 공격하라는 최종 공격 명령을 내렸다. 호찌민 작전이라고 불린 이 작전은 5월 1일 이전에 사이공을 함락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5월 이후 우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남베트남군이 전열을 재정비하게 될 경우 작전에 어려움이 닥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북베트남군은 빠른 속도로 냐짱, 깜란, 달랏을 점령해 나갔다.[154]
    남북 베트남 군대는 4월 7일 사이공 동쪽 64 Km 부근에서 쑤언록 전투를 치렀다. 남베트남군 18사단은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옥쇄하기로 결정하고 북베트남군에 맞섰다. 그러나, 4월 20일 남베트남군 지휘부는 18사단에게 사이공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55]
    같은 날 공포에 휩쌓인 남베트남의 티에우 대통령은 미국이 남베트남을 배반하였다고 비난하였다. 티에우는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에게 2년 전 자신이 파리 평화 협정에 서명하도록 종용하면서 만약의 경우 군사 지원을 약속하지 않았냐고 전문을 보냈다. 4월 25일 티에우는 타이완에 있던 쩐반흐엉(Trần Văn Hương)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비밀리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156]
    4월 말 메콩강 삼각주 지역에서는 명령 체계가 무너진 채 고립된 남베트남군이 여기 저기 흩어진 채 북베트남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사이공에는 수도방위군 3만명이 남아 있었지만 이미 사기는 극도로 떨어져 있었다.[157]

    사이공 함락[편집]

    사이공 함락 직전 헬리콥터를 이용해 탈출하는 남베트남인들
    티에우가 망명하자 많은 남베트남 공직자와 시민들이 공포에 휩싸인 채 사이공을 떠났다. 사이공엔 계엄이 선포되었고, 미군 헬리콥터들이 미국대사관에서 미국 시민과 외국인들을 싣고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프리퀀시 윈드 작전으로 주베트남 미국대사 그레이험 마틴을 비롯한 사람들을 사이공 밖으로 철수시켰다. 1975년 4월 29일 마지막 미군 헬리콥터가 사이공을 떠났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은 사이공을 함락하였다. 324호 탱크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깃발을 들고 사이공 대통령궁의 철문을 부수고 들어간 시간은 11시 30분이었다. 이틀 전 쩐반흐엉으로부터 대통령직을 이양받은 즈엉반민은 항복하였다.[158]

    전쟁 개입국[편집]

    북베트남 지원 국가[편집]

    중화인민공화국[편집]

    1950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베트민이 수립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정식 국가로 승인하고 루오 귀보가 이끄는 군사고문단과 함께 무기를 지원하였다. 당시 베트민은 프랑스를 상대로 한 독립 전쟁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의 지원은

    Comment

    좌번 13-10-02 01:56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입니다.
     비둘기 부대, 청룡 부대, 맹호 부대, 백마 부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당시 대한민국의 박정희 정권은 반공주의를 내걸고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였다. 대한민국의 파병은 미국의 요청이 있기 전인 1961년 박정희가 존 F. 케네디에게 먼저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케네디의 정책은 베트남 전쟁에 미군을 직접 투입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제안을 거절하였다.[167]

    케네디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린든 B. 존슨은 1964년 대한민국에게 의료 부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1964년 5월 9일 미국이 보낸 서한에는 "1개 이동 외과병원"을 파병해 주도록 요청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방부는 130명 규모의 이동 외과 병원과 10명으로 편성된 태권도교관단 등 140명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168] 통킹만 사건이후 미국은 대한민국에 후방 지원 부대의 파병을 요청하였고, 대한민국은 제6사단사령부에서 〈한국군사원조단〉 본부인 비둘기부대를 창설하고 1965년 3월 10일 인천항을 통해 파병하였다. 비둘기 부대는 3월 16일 사이공에 도착하였고, 사이공 동북쪽 22km에 있는 지안에 주둔하여 건설 지원임무를 수행하였다.[169]

    1965년 미국은 베트남 주둔 민군의 사상자가 속출하자 곤경에 빠져 있었다. 1965년 3월 11일 김현철 주미대사는 조지 볼 미국무부 차관과의 면담을 통해 "한국 정부는 베트남에서 추가적인 병력을 기꺼이 파견하겠다."고 말했으며, 이동원 외부무 장관은 브라운 주한미국 대사와의 다음과 같이 협상을 한다.

    파병 상한선은 5만명이내
    한국군의 현대화 지원
    북한의 침공시 미국이 즉각 출병하도록 한미방위조약을 개정한다.
    남베트남에서 사용할 군수품 공급 등 한국의 남베트남 시장진출을 보장한다.
    위와 같은 한국 정부의 요구사항은 1965년 5월 17일에서 18일까지 워싱턴에서 개최된 한미정상회담에서 대부분 타결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6월 14일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전투병력 정식 파병요청서를 접수하고, 8월 13일에 국회 의결을 얻었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창설하고 수도사단장 채명신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청룡 부대가 1965년 10월 9일 깜란에 상륙하였고, 9월 20일부터 주월한국사령부가 사이공에서 업무를 시작하였다. 11월 1일에는 맹호 부대가 뀌년에 상륙을 하였다.[170]

    대한민국의 베트남 파병 병력의 누계는 32만명에 달했다.[171] 베트남파병 병사의 의무 기간은 1년이었고, 파병이 최고조에 달했던 1968년 당시의 베트남에 주둔한 한국군의 수는 5만여 명이었다. 파리 평화 협정으로 미군이 철수하면서 대한민국 역시 철군하였다.[172]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한국군의 전사자는 약 5천여명이었고 1만 1천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국군은 전쟁 중에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전투원 약 4만 1천 여명을 사살하였다고 밝히고 있다.[171] 미국은 한국군 병사에게 2억 36백만 달러를 지불하였고[171], 대한민국은 파병의 댓가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대한민국의 GNP는 파병을 전후로 하여 5배 가량 성장하였다.[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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