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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 주무르며 누린 ‘기춘대원군’의 40년 권력

    • 13-12-30 00:24
    • 1,363
    등록 : 2013.12.27 20:21 수정 : 2013.12.29 17:53
    어떤 대통령은 피살되고, 어떤 대통령은 자살하고, 어떤 대통령은 재산의 대부분을 내놓았지만 한국 엘리트집단의 대표 김기춘은 늘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는 포레스트 검프처럼 남달리 근면하고 성실했지만, 역사에 대한 정직성만큼은 검프와 달랐다. 지난 8월6일 청와대 국무회의가 열리기 전 정홍원 국무총리와 함께 서 있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오른쪽). 청와대사진기자단

    [토요판] 특집 / 김기춘뎐(傳) - 기춘대원군의 흑역사
    육영수 저격범 사형 ‘공로’로 35살에 중정 국장 발탁
    ‘초원복집’‘유서대필’ 등 위기마다 빛난 ‘뒤집기 능력’

    ▶ 오죽하면 ‘기춘 대원군’이라는 말이 나왔을까요.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으면서도 최고의 권력을 휘두른 19세기 말 조선의 실세 ‘흥선 대원군’에서 따온 말이랍니다. 지난 8월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된 김기춘은 ‘총리 위의 비서실장’ ‘막후 실세’ ‘부통령’ ‘왕실장’으로도 불립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왜 그에게 전적으로 의지할까요?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김기춘이라는 사람의 ‘흑역사’를 꼼꼼히 짚어보았습니다. 지은 죄가 많아서인지 100장 넘게 써 온 것을 60장으로 줄였습니다.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티브이엔(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배경이 된 해에 가장 히트한 영화는 <포레스트 검프>였다. 미국 역사의 격동기였던 1960년대와 70년대를 배경으로 아이큐 75 포레스트 검프의 삶을 그린 영화다. 극 중에서 검프는 마틴 루서 킹의 연설 등 역사의 굽이굽이에 모두 등장하면서 케네디, 존슨, 닉슨 등 역대 대통령과 만나기도 한다. 언론과 온라인에서 ‘기춘대원군’이라는 별명을 얻은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 역시 포레스트 검프처럼 격동의 한국 현대사 굽이굽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 인물이다. 두 사람은 남달리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다른 점도 무척 많다. 포레스트 검프의 아이큐는 75에 불과하다. 머리 좋기로 빠지지 않을 안대희 전 대법관(검찰 출신)은 “나는 김기춘에 비하면 발바닥”이라며 그의 아이큐는 170대일 것이라 말한 바 있다. 두 사람의 더 큰 차이는 아이큐보다도 자신과 타인의 삶에 대한, 그리고 역사에 대한 정직성이라 할 것이다. 어느 리뷰에서 “혼란의 시기 속에 ‘순수’와 ‘사랑’을 잃지 않은 한 인간”이라 평한 포레스트 검프의 삶은 우리에게 뭉클한 감동을 주지만 기춘대원군의 흑역사는 나에게 두 가지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바퀴벌레와 오뎅.
    5·16 장학금 받고 광주의 사위가 되다
    온갖 환경 변화에도 굴하지 않고 3억2천만년 동안 살아남았다는 지구의 터줏대감 바퀴벌레. 그 어떤 방법으로도 퇴치가 불가능하다는, 마음 고쳐먹고 동거하는 수밖에 없다는 그 바퀴벌레. 오뎅은 한국 엘리트 집단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포장마차 아주머니가 저녁때 장사를 나와 오뎅을 끓이면 새벽에 일 마칠 때까지 통을 비우는 법이 없다. 오뎅이 많이 팔리면 꼬치 더 집어넣고, 국물 졸아들면 물 더 붓고, 싱거우면 간장과 양념 치고, 무 더 썰어넣고, 그렇게 해서 새벽까지 통을 비우지 않고 오뎅을 판다. 신라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일제시기로, 일제시기에서 해방으로, 군사독재에서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그 숱한 상황변화에도 한국 엘리트 집단의 본류는 단절된 적이 없다. 그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 한국 엘리트 집단이라는 종을 대표하는 개체가 바로 ‘왕실장’ 김기춘이다.
    1939년생인 김기춘은 2013년 8월5일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말을 유행시키며 일흔다섯의 나이에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조선왕조 500년을 포함해도 최고령 도승지(조선시대 승정원의 6승지 중 수석 승지로 왕의 비서장 격)가 아닐까 한다. 김기춘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역대 최고령 도승지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역대 가장 막강한 비서실장이기 때문이다. 중국에 부도옹(不倒翁) 덩샤오핑이 있다면 한국에는 격변의 세월을 살아남아 대원군에 오른 오뚝이 김기춘이 있다.
    김기춘의 독특한 이력은 1991년부터 1997년까지 정수장학회 장학금 수혜자들의 모임인 상청회의 회장을 지냈다는 점이다. 1958년 서울법대에 입학한 김기춘은 3학년 때인 1960년 말에 제1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김기춘이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5·16장학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것은 1963년과 1964년, 그가 해군 해병대 법무관으로 근무하면서 어떤 재주를 부렸는지 모르지만 서울대 대학원을 다닐 때였다. 이것이 그가 박정희 일가와 처음 인연을 맺은 때다. 흥미롭게도 5·16장학회 설립에는 박정희의 사단장 시절 법무참모를 지낸 신직수(1927~2001)가 깊이 관여했다. 대한민국에서 관운이 제일 좋다는 소리를 들은 신직수는 법무장관, 중앙정보부장, 대통령 특보 등 자리를 옮길 때마다 김기춘을 데리고 다니며 오늘의 그를 만들어준 후견인이었다.
    군복무를 마친 초임 검사 김기춘의 첫 발령지는 광주였다. 일설에는 그의 장인이 된 박찬일 변호사가 김기춘을 사위로 삼기 위해 김기춘의 첫 부임지가 광주가 되도록 로비를 했다고도 한다. 반면 김기춘 자신은 서울법대 동기동창의 동생으로 지금의 부인인 박화자 여사에게 반해 그와 결혼하려고 스스로 광주를 임지로 선택했다고 주장했다.(<경향신문> 1990년 1월5일치) 김기춘이 결혼식을 올리던 1965년만 해도 아직 영호남 간에는 지금과 같은 험한 지역감정이 없었다. 김기춘은 대단한 애처가로 알려져 있다. 다들 악몽처럼 기억하는 일이지만 김기춘은 한국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지역감정 조장 사례인 1992년 초원복집 사건의 주역이었다. 그런 김기춘이 처가가 광주였고, 광주 출신의 아내를 매우 사랑한 부드러운 남자였다. 이완용이 최고의 학식과 인품과 교양을 갖춘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던 것처럼.
    60년대
    아이큐 75지만 순수와 사랑으로
    뭉클한 감동 준 포레스트 검프
    머리 좋은 서울법대생 김기춘은
    3학년때 사법고시 합격하고
    5·16장학금 받으며 권력과 인연
    70년대
    신직수 따라다니며 승승장구
    유신헌법의 알맹이를 만들고
    재일동포 간첩사건 고문 조작
    문세광 입 열어 사형시킨 뒤
    박근혜 원수 갚아준 은인으로
    유신헌법 직접 만들었으니 ‘티브이 명해설’
    김기춘은 1967년 부산지검 검사, 1969년 서울지검 검사를 거쳐 1971년 8월에 법무부 법무과 검사로 발령이 난다. 1971년 6월 신직수가 법무부 장관이 된 직후였으므로, 신직수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게 되었다. 서울법대 헌법학 교수로 있다가 유신헌법 제정에 상당한 역할을 했으며, 뒤에 유신정우회(유정회) 국회의원으로 정책위의장을 지낸 한태연은 2001년 12월 한국헌법학회가 연 ‘역사와 헌법 학술대회’에서 유신헌법 제정 과정과 김기춘의 역할에 대해 상세한 증언을 한 바 있다.(“유신헌법은 박정희가 구상하고 신직수·김기춘이 안을 만들었다” <오마이뉴스> 2001년 12월9일치) 한태연은 “측근들 얘기를 들으면 평소부터 박 대통령은 드골 헌법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며 “김기춘 과장을 파리에 보내 1년 동안 드골 헌법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도록 했다”고 소개했다. 한태연은 “나와 갈봉근 (당시 중앙대) 교수가 (법무부에) 가보니 신직수 장관과 김기춘 과장이 주동이 돼 안을 모두 만든 상태였다”며 “장관이 ‘골격은 손댈 수 없다’고 해 ‘자구 수정’ 정도만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기춘은 자신은 파리에 간 일이 없고 당시에 과장이 아니라 평검사였다며, 자신은 프랑스에서 ‘비상사태하에서 대통령 권한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 등에 대해 조사하여 보고하는 정도 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고 한태연의 발언을 부인했다. 디테일에서는 한태연의 기억이 착오일 수 있으나, 비유해서 말한다면 한태연은 유신헌법의 포장지를 만들었고 김기춘은 그 알맹이를 만들었다고 할 것이다. 김기춘은 또 유신헌법에 대해 “티브이에 나와 명해설을 하기도 해 이름이 났었다”고 한다.(<경향신문> 1981년 4월27일치) 유신헌법 제정 공포 이후 첫 검찰인사(1973년 4월초)에서 김기춘은 법무부 ‘인권옹호과’ 과장으로 승진했다. <중앙일보> 1973년 4월3일치는 김기춘과 그의 고시 2년 선배인 정해창이 “유신체제의 법령 입법과 개정의 공로와 실력이 높이 평가되어 유례없이 발탁”되었다고 보도했다. 1973년 봄의 검찰 인사에서 법무부 과장(부장검사급)으로 승진한 사람들이 주로 사법고시 8회(<경향신문> 1973년 4월2일치)였기 때문에 12회인 김기춘이 승진한 것은 참으로 유례없는 일이다.
    평검사 김기춘은 과장(부장검사)으로 승진했지만, 법무부 장관 신직수는 1973년 말 중앙정보부장으로 영전했다. 이때 신직수는 김기춘을 중앙정보부로 불러들여 부장의 법률보좌관을 삼았다. 1974년 8월15일, 35살의 새파란 검사 김기춘을 40년 후 최고령 도승지로 만들어준 숙명의 사건이 일어났다. 김대중 납치사건에 분노한 재일동포 문세광이 국립극장에서 박정희를 저격했고 그 와중에 육영수가 피격 사망한 것이다.
    김기춘은 이 사건 수사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기춘 자신이 <시비에스>(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에서 증언한바, 문세광은 사건 발생 하루가 지나 “8월16일 오후 5~6시경까지도 묵비하고 일체 질문에 답을 안 했다”고 한다. 김기춘은 문세광의 말문을 열도록 하라는 신직수의 지시로 수사팀에 합류했다. 김기춘은 “피의자들을 신문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첫번째 질문”이고, “보통 첫 질문에 답변을 거부하면 계속 답변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기에 고심 끝에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드골 프랑스 대통령 암살을 다룬 <자칼의 날>이라는 소설을 읽었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때까지 일체의 답변을 거부하던 문세광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선생도 읽었냐고 말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김기춘은 문세광이 일체의 신문에 8월16일 오후 5~6시경까지도 묵비하고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조간신문 8월16일치를 보면 문세광이 이미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을 진술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육영수가 실제로 문세광의 총에서 발사된 총탄에 희생된 것인지는 지금도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당시 수사당국은 첫째 ‘육영수 여사의 살해범은 문세광’이고, 둘째 ‘그의 배후에는 조총련이 있다’고 단정지었다. 박근혜의 입장에서는 문세광을 범인으로 특정하여 그를 사형에 처하게 만든 김기춘 등 수사진은 바로 어머니의 원수를 갚아준 고마운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 관한 한 현재 박근혜 대통령 주변에 있는 그 어떤 사람도 김기춘에 대한 박근혜의 신뢰와 고마운 마음을 넘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문세광 사건 수사에서 나름 중요한 역할을 한 김기춘은 그 공으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승진했다. 김기춘은 서른다섯살 나이에 중앙정보부에서 가장 막강한 부서의 책임자가 되어 유신체제 유지의 대들보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대공수사국장 시절 김기춘의 대표작이 1975년 11월22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학원침투 북괴간첩단’ 적발사건이다. 이 사건의 주요 피해자들은 재일동포였고 사건 관련자들은 부산대·서울대·한신대에 유학중이거나 이들과 친하게 지낸 재학생들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1975년은 인혁당 관련자 사형 집행, 남베트남 정권 붕괴, 장준하 암살 등 참으로 살벌한 때였다. 부산대로 유학 온 김오자라는 젊은 재일동포 여학생은 한국 사회를 엄습한 그 깊은 침묵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혼자 유인물을 쓰고 만들고 뿌렸다. 거기서 단서가 잡혔다. 그때만 해도 유인물에 한자를 쓸 때였는데 노동을 한자로 쓰면서 일본식으로 동에 사람인변을 붙여 으로 쓴 것이다. 중앙정보부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재일동포 유학생들이 무더기로 붙잡혀가 조사를 받았다. 당시 한국에 와 있던 재일동포 유학생은 200~300명에 불과했는데 이 사건 하나만으로 전체의 10%가량이 한꺼번에 간첩으로 몰렸다. 김오자 등은 수사과정에서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 김오자의 옆방에서 수사받은 재일동포 유학생 김동휘에 따르면 ‘인간의 비명 소리가 아닌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박정희 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한겨레21> 제885호, 2011년 11월14일치)
    허화평한테 궁지 몰리자 박철언한테 매달려
    수사책임자 김기춘은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 이 사건의 또다른 특징으로 관련자 중에 여학생이 많다는 점을 꼽으며 “지하철이나 버스정거장 등지에서 중견장교에게 추파를 던져 접근, 소속부대의 임무 등 군사기밀을 빼내려 했다”고 주장했다.(<중앙일보> 1975년 11월22일치) 5공 시절 부천서 성고문 사건 당시에 공안검찰이 운동권 여학생들이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삼는다고 비난한 바 있는데 김기춘은 그 10년을 앞서간 것이다. 이 사건으로 몇 명 되지 않았던 부산대 운동권은 쑥대밭이 되어 1979년 10월 부마항쟁으로 폭발할 때까지 만 4년간 데모가 한 건도 없었다.
    6공의 황태자라 불렸던 검찰 후배 박철언은 5공화국 시절 김기춘이 궁지에 몰렸을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실이 있는데, 이를 자기 회고록(박철언,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1>)에 자세히 털어놓아 김기춘을 거북하게 만들었다. 김기춘이 죽다 살아난 이 사건을 살펴보려면 먼저 1977년으로 돌아가보아야 한다. 김기춘이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된 뒤 <동아일보> 논설주간 황호택은 과거 김기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이 사건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했다.(인터넷 동아일보 2013년 8월15일치, ‘황호택 칼럼-오뚝이 김기춘 실장의 마지막 공직’) 그에 따르면 “1977년 10월 전방 사단에서 대대장 유운학 중령이 무전병을 데리고 월북하는 사건”이 터졌는데, 당시 보안사는 유운학 중령이 북한에 의해 납치되었다고 박정희에게 허위로 보고했다. 박정희는 보안사의 보고를 믿지 않고 합참과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김기춘에게 진상조사를 지시했다. 사실 유운학은 사단 보안대에 약점이 잡혀 고민하다 스스로 월북해버린 것이었다. “일선의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들 사이에서는 보안사 등쌀에 못살겠다는 원성이 자자했다”는 김기춘의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크게 화를 내며 보안사의 권한을 축소하는 개혁안을 김 국장에게 성안하도록 지시했다. 박정희는 김기춘이 올린 개혁안에 따라 “보안사 정보처를 없애고 보안사 요원들을 정부 부처 및 기관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사살되는 10·26사건이 터지자 위세당당하던 중앙정보부는 졸지에 역적기관이 되었고, 간부들은 김재규와의 공모 여부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다는 명목으로 모두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황호택은 중정을 접수한 보안사 요원들이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이 김기춘이었다고 증언했다. 김기춘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가 대공수사국장으로 있었다면 꼼짝없이 서빙고로 끌려가 초주검이 되도록 당하고 옷을 벗어야 했을 것이다. 김기춘이 김재규 밑에서도 2년가량 대공수사국장을 지내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신직수와 박철언 덕이었다. 1976년 12월 중앙정보부장이 신직수에서 김재규로 교체될 때 김기춘은 계속 대공수사국장으로 있었는데, 신직수는 1979년 1월 청와대 법률담당 특별보좌관으로 기용되자 김기춘을 데려다가 청와대 법률비서관으로 삼았다. 김기춘은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근혜와 접촉할 기회도 자주 있었을 것이다. 유신시대 최고로 잘나가던 김기춘은 박정희 사후 친정인 검찰로 복귀했다.
    전두환이 유신헌법 대신 5공화국 헌법을 만들고 정식으로 5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문제가 불거졌다. 전두환 정권은 법원에서는 법관 재임명으로 37명을 탈락시켰고, 검찰에서는 “10년 이상 경력을 가진 검사 200명에게 검찰쇄신을 위해 인사권자가 소신 있게 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명분 아래 일괄 사표를 제출하도록 하여 이 중 26명의 사표를 수리”했다.(<매일경제> 1981년 4월25일치) 전두환의 보안사령관 시절 비서실장으로 세도가 당당했던 허화평(육사 17기)이 보안사와 악연이 있는 김기춘의 옷을 벗기려 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궁지에 몰린 김기춘은 청와대 비서관으로 있던 대학후배 박철언에게 매달렸고, 박철언은 김기춘에게 허화평에게 전달해줄 테니 편지를 써달라고 말했다. 김기춘은 얼마 후 “일종의 충성맹세”인 “구구절절 장문의 편지”를 써 왔고, 박철언은 이 편지를 허화평에게 전달하며 적극적인 구명에 나섰다. 그 덕에 김기춘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았고 검사장으로 승진하기까지 했다. 박철언 덕분에 검사장에 승진하기는 했으나 보직은 검사장급에서 한직으로 취급받는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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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양라면 공업용 쇠기름 사건도 그의 작품
    전화위복, 새옹지마란 말이 있다. 오뚝이 김기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유신 시절 동기들이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앞서가던 김기춘은 5공 때는 찬밥을 먹었다. 세월이 바뀌어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뒤 여소야대 상황에서 5공 청산이 시대적 과제가 되었을 때, 5공 시절 찬밥을 먹은 김기춘은 1988년 12월 검찰총장으로 화려하게 무대의 중앙에 복귀했다. 김기춘이 지휘하는 검찰은 1989년 ‘5공 비리’ 수사를 진행하면서 전 안기부장 장세동 등 49명의 5공 인사를 구속했다. 한 가지 흥미있는 것은 처음에 김기춘의 옷을 벗기려다가 충성편지를 받고 김기춘을 살려준 허화평은 당시 그가 소장으로 있던 준국책연구기관 현대사회연구소 노동조합이 허화평의 구속을 요구하며 시위(<한겨레> 1988년 12월3일치)를 벌였는데도 구속을 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김기춘이 검찰총장으로 있던 시절은 바로 민주화 이후 수구세력의 반격이 시작되어 공안정국-보수대연합-범죄와의 전쟁이 이어진 시기였다. 이때 김기춘은 ‘미스터 법질서’,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의 선봉장’을 자임하면서 좌경용공세력과 폭력세력을 척결하겠다는 강경발언을 연일 쏟아냈다. “6·29선언 이후 민주화라는 미명 아래 좌경세력이 사회 곳곳에서 머리를 드는 데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김기춘이 검찰총장으로 있을 당시 또하나의 야심작은 검찰이 삼양식품 등이 라면 제조 공정에서 공업용 쇠기름을 사용했다는 혐의로 회사 대표 등 여러 명을 기소한 사건이었다. 수년간에 걸친 공방 끝에 그들은 모두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첫 임기제 검찰총장 김기춘은 1990년 12월5일 2년 임기를 마치고 총장에서 물러났지만, 곧 일선에 다시 등장했다. 1991년 4월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전경들에게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노태우 살인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는 격렬하게 일어났고, 그 와중에 학생들의 분신이 연이어 발생했다. 5월8일에는 재야단체의 연합조직인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 서강대에서 분신자살하자 정부와 수구세력은 학생들의 분신에 조직적 배후세력의 개입이 있다는 희한한 주장을 내놓았다. 그리고 검찰은 김기설의 유서를 전민련 동료인 강기훈이 대필했다면서 강기훈을 구속했다. 5월초에 숨진 박승희의 장례가 광주에서 무려 20만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거행되고, 서울에서는 또다른 여학생 김귀정이 경찰의 강제해산 과정에서 숨지자, 노태우 정권은 다음날인 5월26일 김기춘을 법무부 장관에 임명했다.
    민주화 이후 중앙정보부-안기부는 체제 유지의 전면에서 한발 물러서야 했다. 유서대필 사건은 이 공백상태에서 발생한 위기를 검찰이 온몸을 던져 막은 것이다. 유서대필이란 지금이나 그때나 말이 안 되는 사건이었다. 검찰도 수구세력도 그것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그런 황당한 주장을 한 치의 주저함 없이 밀고 나가야 할 만큼 노태우 정권은 위기에 빠져 있었다. 검찰이 주도한 유서대필 사건은 군과 정보기관이 퇴조한 가운데 검찰이 체제유지의 주력부대임을 과시함으로써 대한민국을 한동안 ‘검찰공화국’으로 만든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서 김기춘은 선발투수는 아니었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구원등판하여 노태우 정권을 지켜내는 데 혁혁한 기여를 했다.
    <뉴스타파>의 보도에 따르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조작한 검사들 대부분이 박근혜 후보의 대선캠프 주변에 몰려 있었다. 김기춘은 원로그룹인 7인회의 일원이었고,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장으로 사건의 수사책임자였던 강신욱은 검찰 몫의 대법관을 지낸 뒤 2007년 박근혜 캠프의 법률지원 특보단장을 지냈다. 수사검사였던 남기춘은 박근혜 캠프의 열린검증소위원장, 수사검사였던 윤석만은 박근혜 후보의 외곽조직인 대전희망포럼 공동대표였다. 또 수사검사였던 곽상도는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첫 민정수석이 되었다가 채동욱 검찰총장을 장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밀려난 바 있다. 김기춘은 이들 모두의 우두머리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오른쪽)이 지난 8월8일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은 뒤 박근혜 대통령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80·90년대
    5공 땐 찬밥 먹으며 버텼지만
    5공청산 때 검찰총장으로 부활
    노태우 중대위기서 구원등판
    ‘초원복집’사건에도 굴하지 않고
    고향 거제서 3연속 국회의원 당선
    2000년대
    헌법재판소를 아주 잘 이용해
    노무현 탄핵안 접수시키더니
    이젠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
    박근혜 비서실장 임명 직후엔
    “윗분의 뜻을 받들어” 명대사
    ‘탁월한 법률가’ 김기춘의 완벽한 탈출
    복어를 잘못 먹으면 탈이 난다. 치밀하고 깔끔하기로 소문난 김기춘도 복어집에 갔다가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도록 망신한 일이 있다. 아니, 사실 망신이 아니라 정의가 제대로 섰다면 흉악범죄로 처벌받아 마땅한 행위의 수괴였던 것이다. 그 망측한 모의 내용이 고스란히 녹음되어 세상에 까발려졌다. 14대 대통령선거를 이틀 앞둔 1992년 12월16일, 전 법무장관 김기춘이 부산에서 부산시장·검사장·경찰청장·안기부지부장·교육감·기무부대장·상공회의소장 등 기관장을 모아놓고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겨 민자당 김영삼 후보를 지원할 것을 모의했는데 이를 국민당 정주영 후보의 아들 정몽준 의원 쪽에서 도청하여 녹음한 테이프를 공개한 것이다.
    각 언론이 정몽준 의원 쪽에서 녹음한 테이프를 풀어 상세히 보도하면서 “우리가 남이가” 등 거기서 김기춘이 한 발언은 한동안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날 김기춘은 “중립내각이 나왔기 때문에 마음대로 못해서 답답해 죽겠다”면서도 치밀한 성격과는 달리 막 달렸다. 그 자리에 모인 공직자들은 아직 장관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인데 김기춘은 그들에게 “안 해봐서 그런 거야. 장관이 얼마나 좋은지 아나, 모르지”라고 자랑하면서 “부산·경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 정주영이 어쩌니 하면 영도다리에서 칵 빠져 죽자”고 지역감정을 부추기기도 했다. 워낙 자기가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하면서 무리수를 많이 두었던 것을 염려한 탓인지 김기춘은 “잘못되면 혁명적 상황이 와서 전부 끌려들어가야 할 판인데 여당 해야지 그럼 어떡합니까”라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라는 노골적인 주문을 하면서 “훗날 보면 보람 있는 시민이라고 다들 느끼게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자신했다. 녹음테이프가 돌아가고 있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속마음이 고향에 가 한잔한 김에 거침없이 나온 것이다.
    세상은 발칵 뒤집혔지만, 뒤집기의 달인은 따로 있었다. 국정원 직원이 댓글을 달던 현장에서 적발되자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은 일을 가녀린 여직원을 무지막지한 자들이 감금한 인권유린 사건으로 뒤집은 신공은 이미 20년 전 초원복집 사건 때도 발휘되었다. 이 사건은 공권력을 동원하여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파렴치한 부정선거 모의가 아니라 불법적 반인륜적 도청사건이 된 것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김기춘은 감옥에 가야 했고 초원복집 사건으로 그는 더이상 공직을 맡을 수 없어야 마땅하다. ‘부정선거 하기 좋은 나라’ 대한민국에서 검찰은 초원복집에 모인 기관장들을 “공식 석상이 아닌 사적 모임에서 나눈 대화를 가지고 처벌할 수는 없다”며 무혐의 처분하고 모임을 주재한 김기춘만 불구속 기소했다. 선거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된 김기춘은 김영삼이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인 1993년 3월 “선거운동원이 아닌 자의 선거운동을 규정한 구(舊) 대통령선거법 제36조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참정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어 위헌”이라며 법원에 위헌제청을 신청했다. 이에 <동아일보>는 김정훈 기자의 기명칼럼(1993년 3월20일치)을 통해 장관 재직 당시 “유난히 선거관련법의 엄정한 집행을 강조”했던 김기춘이 “막상 이 법률이 자신에게 올가미로 다가오자 이의를 제기”했다며, 이 위헌심판 제청이 “법의 이름을 빌려 면죄부”를 구하려는 “탁월한 법률가 김기춘의 완벽한 탈출구”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결국 1994년 여름 헌법재판소는 이 조항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고, 김기춘에 대한 재판은 공소 취소로 없던 일로 끝났다. 법비(法匪)란 말이 있다. 온갖 비적이 들끓던 만주에서 가장 무서운 비적은 법으로 무장한 법비였다. 김기춘이야말로 법비 중의 법비였다.
    법비 김기춘은 1996년 신한국당의 공천을 받아 고향 거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2000년과 2004년 선거에서 연거푸 당선되어 3선 의원이 되었다. 국회의원 시절 그가 가장 플래시 세례를 받은 것은 2004년 3월12일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뒤 헌법재판소에 탄핵안을 접수시킨 때였다. 당시 김기춘은 국회 법사위원장으로 탄핵소추의 검사 격이었는데 법사위 여당 간사는 16대 국회에 제출된 친일진상규명법안에 대해 여야 합의가 이루어졌음에도 법사위에서 단기필마로 법안을 누더기로 만들어버린 합천 출신의 김용균이었다.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한 것이 제명 사유가 된다는 지금이나 유신시대와 비교한다면, 대통령을 실제로 자르려고 했던 2004년의 탄핵은 절차민주주의가 극한으로 만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누려 탄핵안을 가결시키고 헌법재판소에 접수시키러 간 자들은 친일과 유신과 5공과 지역감정의 화신들이었다. 김기춘과 김용균이 탄핵안을 헌법재판소에 접수시키는 사진은 온 나라를 뒤흔든 탄핵사태의 본질이 ‘과거 청산 없는 민주화가 초래한 민주주의의 위기’였다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박근혜 ‘쉰 386 세대’의 맨 앞줄에 서다
    김기춘은 이렇게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아직 60대였던 2008년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고령자라는 이유로 공천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는 “이유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공천 탈락을 당했다”면서도 당의 결정에 승복하여 무소속 출마를 포기하고 “존경받는 원로의 한 사람으로” 남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금 김기춘은 한국 정치의 최전선에 서 있다. 김기춘만이 아니다. 김기춘은 어딘가에서 “연산군 밑에는 채홍사들이 들끓고 세종대왕 옆에는 집현전 학자들이 모였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지금 박근혜의 주변에는 누가 모여 있을까. 오죽하면 노무현 시대의 386세대 대신 1930년대에 태어나 나이 80을 바라보며 60년대에 공직에 입문한 ‘신 386세대’ 또는 ‘쉰 386세대’라 불리는 흑역사를 자랑하는 올드보이들만 꾸역꾸역 나오고 있을까.
    김기춘이 비서실장에 임명된 직후 공식브리핑에서 “윗분의 뜻을 받들어”라는 말을 하여 젊은 기자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사실 유신 전야인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당시에 남쪽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과 북쪽의 부총리 김영주(김일성의 친동생)가 서명하면서 직함을 쓰지 않고 서명만 하면서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라고 한 적이 있다. 남북이 20여년간 서로 상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호나 직함을 쓰는 것이 거북했던 점을 나름 운치있게 비켜간 것이다. 반면 21세기 김기춘의 발언은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서실장의 말이라기보다는 봉건시대 도승지나 할 법한 얘기였다. 6월항쟁의 산물로 탄생한 헌법재판소를 잘 이용해 살아난 유신본당에 지역감정의 화신 김기춘은 이제 왕실장으로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를 다시 헌법재판소로 가져갔다.
    검찰총장직에서 물러나면서 김기춘은 후배 검사들에게 “학생시절의 순수성 정의감이 끝까지 퇴색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을 남겼다.(<동아일보> 1990년 12월5일치) 남다른 흑역사를 간직한 김기춘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학생시절의 순수성과 정의감은 안녕들 하십니까?
    한홍구/성공회대 교수·교양학부